어느 노인의 연하장

by 조성원10 posted Dec 28, 201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책상위에 놓인 연하장 하나. 막상  마음을 열어 보려니 송구함이 앞선다. 늘 보아온 謹賀新年이건만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한 때는 직접 만들어서 보내기도 하였는데 게으름은 실로 도를 넘는다. 왜 날로 번창하는 소심이고 무능인지 모르겠다. 요즘 나 같은 위인이 부쩍 느는 세상 아닌가 싶다.

 

몇 년 만에 다시 받는 어느 노인의 연하장이다. 이삼년 째 뜸하여 별 생각을 다 하였었다. 봉투를 보니 나의 한자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필체가 뚜렷하면서도 견곤한 틀이 예나 다름없다. 주소가 옆 동네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당뇨가 있다 하였는데 필체로 느끼는 변함없는 그의 건강이다. 그런데 내가 그 분에게 연하장을 받을 만한 존재이던가.

 

참으로 송구하기 그지없으며 고마운 분이다. 내가 그 노인을 만났던 때는 꽤 오래 전이다. 정확히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던 때 그와 나는 개막식을 보지 못하고 같이 있었다. 장항제련소에서 부사장까지 지냈다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 해 부천의 어느 기계공장에서였다. 방사능물질을 실험하는 곳에서는 납으로 된 문이 필요로 한다.

 

납은 밀도가 콘크리트나 철보다 높으니 단연 밀폐에선 쓰임이 많다. 하지만 납은 중금속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으며 철과 납은 잘 달라붙지 않으니 접촉면에서의 간극이 빈틈으로 작용하여 감마선 투과 등을 할 때 그 허점이 나타난다. 그러한 차폐 문을 제작하려는 때 철문의 안에 납을 쟁여 넣는 일을 그가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어느 소속도 아니고 단신이었다. 몇 차례의 사업실패로 좌절하던 때 나를 만난 것이다. 그 공장의 윗사람과의 친분으로 그곳을 찾아온 그였지만 개인인 그에게 50톤에 이르는 중량물 제작을 맡긴다는 것은 무리였다. 도면이나 시방을 들이밀며 설명을 할 줄도 몰랐던 그였기에 더욱 난감하였다.

 

공장 실무자들은 감독인 나에게 거절 해줄 것을 거꾸로 부탁하였다. 우선은 그의 설명을 듣고 찬찬히 납득시켜 포기하도록 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그가 나타났다. 그는 도면도 없었으며 브리핑 차트도 없었다. 속으로 옳다 싶었다. 그런 그는 앉자마자 누런 봉투에서 무엇인가 물컹한 물체를 잔뜩 끄집어내었다.

 

모두들 의아해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여러 형상의 지우개였다. 그는 철문 통 안에 어느 형상을 어떻게 넣을 것인지 지우개를 가지고 이리 만들어보고 저리 만들어 나름의 방법을 갖고 나타난 것이었다. 난 솔직히 그 순간 탄복 하였다. 도면이 달리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자중으로 눌러 스스로 틈새를 줄이는 방식의 형상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특허 깜이다. 그와는 그로 인연이 되었다. 그 해 10월 1일이 납기 시한이라 그와 나는 9월 20일 현장에서 납덩어리를 철문 안에 채우는 작업을 시작하였었다. 꼬박 10일을 채워 감마선 스캐닝 검사에도 합격을 하였다. 그와의 일은 그것이 전부이다.

 

그 후 그 일로 고맙다고 일군 것이라며 고구마를 잔뜩 짊어지고 그가 한 번 찾아 온 적이 있다. 여전히 궁핍해 보이는 그였다. 돌아서는 길 기차표를 끊어주었었다. 그가 술에 취해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 조감독! 나 그때 그것 안 되면 인생 포기하려고 했었어.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더란 말이지. 그때 내 스스로 감격했었지”

 

이후부터 난 그의 연하장을 거름 없이 받는다. 난 그에게 어떤 존재로 사는 것일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는 내게 연하장을 보낸다. 처음엔 나의 배려로 의당 그가 보내는 것이련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해가 바뀌면서 생각이 그렇지가 않다. 어느 한 때 그에게 미덕을 건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그가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배려는 꾸준하게 지속하여 그로 화평을 갖는다.  70이 넘었을 그가 나에게 전하려는 뜻이 ‘삶의 가치 소중함의 한 자락은 두고두고 잃지 말고 갖고 사시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난 꾸준하면서도 깊숙이 마음을 전하는 알뜰함에 충실하지 못하다.

 

연하장 속에 하얀 눈이 내 마음 속에 오늘 수북이 쌓인다.  이북 말씨 특유의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마저 들리는 듯도 하다. "조 감독 ! 살다보니 알 것 같은 게 마음의 정성이고 그것이 삶의 큰 보배란 생각이오. " 올 한해가 다 간 이쯤  칼칼한 그의 목소리가 그렇게 꼭 듣고 싶어진다. 오래 사세요. 손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