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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난 일이다. 저녁 회식 자리였는데 한참 선배 한 분이 다른 테이블에서 내 쪽으로 옮겨 오셨다. 그러고는 작심한 듯 하는 말씀이, “얘는 새까만 후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몰라. 만만하지가 않아.”
나는 만만하지 않은가 보다. 어릴 때부터 줄곧 들어온 얘기가 그랬다. 만만하지 않다는 건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니 사회생활을 하는 데 나쁘지 않았다. 사회생활이란 게 많은 경우 주도권 싸움이지 않은가. 자칫 만만하게 보였다가는 이 사람, 저 사람에 휘둘리고 간섭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나는 야단치기 편한 후배가 아니었으니 비교적 내 생각을 관철시키며 살았고, 어린 시절 동료들은 이런 나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 또한 나의 만만치 않음을 즐겼던 것 같다. 그런데 내게도 후배가 생기고, 나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후배들과 맞닥뜨리고 보니 만만치 않다는 것의 다른 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꽤 오래 전 일인데, 두 가지 프로젝트를 두 명의 후배와 동시에 진행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은 그간의 평판이나 퍼포먼스가 썩 훌륭한 편이 아니어서 중간 과정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의 목소리가 많이 섞였다. 그 후배는 중심에 서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몹시 괴로워했다.
반면 또 한 후배는 애초에 잔소리 할 일이 없도록 알아서 잘해 나갔다. 그의 준비에 대해 이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의견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무언가가 그로부터는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은 말을 아꼈고 그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영 딴판이었다. 중간 과정이 위태롭고 불안했던, 그리하여 같이 일한 사람들로부터 계속 걱정을 들었던 앞의 후배가 훨씬 좋은 결과를 냈다.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계속 다른 의견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 자신은 썩 유쾌하지 않았겠으나, 다른 생각이 들어오고 섞이면서 애초 그의 아이디어는 훨씬 발전되었고 성과도 좋았다.
반면 자신이 다 알아서 한 두 번째 후배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에게는 나머지 사람의 다른 생각과 의견이 말해지지 않았는데 나중에 복기해 보니 우리 모두는 그의 기세에 눌려 입을 열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광고 경력 25년의 시니어가 되었다. 어느 자리엘 가도 대게는 내가 윗사람이고 같이 일하는 파트너도 거의 후배들이다. 그중엔 이제 막 새롭게 직책을 맡은 후배도 있는데, 말하자면 책임자로서는 초보인 셈이다.
초보 때는 모르는 것, 실수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니어들도 다 그렇게 컸다. 그러므로 시니어들은 후배에게 가르쳐 주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막상 입을 열어 얘기를 할라치면 말이 튕겨져 나옴을 느낀다.
하지만 이해할 법도 하다. 이제 처음 자신이 권한을 갖고 일하려는데 또 무슨 잔소리를 듣고 싶겠는가. 그래서 초보일수록 도움을 구하지 않고 성을 쌓는다.
게다가 야단치기 어려운 사람이 만만치 않은 태도로 그러면 놔두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하지만 편히 야단치거나 맞으면 줄일 수 있는 시행착오가 그대로 노정된다면 우선은 본인이 손해고 회사 또한 손해다.
후배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만만하고 야단치기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간의 실수와 실패 중 많은 것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들은 왜 늘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인지….
선배에게 야단맞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후배에게 무시당하는 것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남의 얘기를 듣는 것은 단지 태도가 아니라 능력이며 때때로 성과는 거기서부터 갈린다.
최인아 제일기획 제작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