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3 14:00

정월 대보름

조회 수 1870 추천 수 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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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런 겨울바람이 잠잠하다하였더니 낮이 벌써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설날을 지나 성큼성큼 다가선 달이 어느새 휘엉청 밝게 피어올랐다. 놀기로는 정월 대보름날이 설날보다 훨씬 좋았다. 때 검정 잔뜩 뭍은 그 시절의 어린 동화가 낭랑한 바람 되어 소상히 떠오른다.

 

정월 대보름쯤엔 할 일이 많았다. 장독대 있는 뒤쪽부터 해서 앞마당 큰 마당을 깨끗하게 쓸어서 마당 끝 구석진 곳에 모닥불을 피웠다. 한 철 나도는 잔 벌레의 허물에 묵은 잡스런 것들이 모이지는 때는 옴짝달싹 하지 못했던 겨울철의 추운 기억들도 고스란히 연기 되어 숭숭 날아올랐다. 그쯤엔 논둑이 듬성듬성 까맣게 그을린 기계충이 옮아 못 생긴 모습을 송두리째 드러내었다.

 

액을 쫓고 운을 갖는 민족의 건강 기원제. 그런 의식의 날, 어른들은 사람의 삶 못지않게 더없이 소중했던 소와 돼지에게도 한해를 건강하게 지내도록 목 부위에 볏 집을 왼쪽으로 꼬아서 매었다. 볏 집 꼬는 것이 짐승들에게는 왼쪽이고 사람은 오른쪽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꼬박꼬박 챙겨 들었던 시절. 귀신 가는 길목을 그쯤 알 것이면 대단한 액땜 술이 아니던가. 그리 믿어두면 행하는 마음은 그저 편한 것이리라.

 

보름날 아이들이 일어나자마자 할 첫 일은 밤, 호두, 땅콩을 입에 넣고 깨무는 일이었다. 부럼을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며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한다는 것이 어찌 논리로 말할 것인가. 일 년 내 그만한 신성한 의식은 없다. 따로 날을 두어 나누어준 자연스런 의식 속에 지금 우리들이 성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아침밥은 의당 오곡밥을 먹는 것인데 씹히는 억센 느낌이 만만치 않아 입 짧은 아이는 조그만 냄비에 흰 쌀 밥을 석유곤로에 따로 해서 부뚜막에 앉아 밥을 먹기도 하였다. 가난에 찌든 세월이지만 삶의 정성은 실로 극진하였던 시절. 바삐 사는 세상에선 이 또한 어쩔 수 없다고들 말하지만 소박한 정성은 이제는 없다. 그러해서 그 시절이 더욱 그리운 것인지 모른다.

 

수북한 진수성찬의 날이 바로 이 날이 아닌가. 고사리나물, 마른 호박나물. 피마자잎나물, 고구마줄기 나물, 시래기나물, 생선으로는 소화가 잘되는 짭짭한 박대와 장대라는 생선, 그리고 고소한 맛에 비해 살점이 층층이 부서져 버리는 굴비가 있었으며 상 한가운데는 두부가 얹힌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가 자리했다. 그 밥에 그 나물을 다 먹고 나면 입가심으로 가마솥에서 끓여 만든 숭늉을 그득 퍼 마셨다.

 

몇 번을 더 얹혀 먹어야 운이 좋다 하여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던 대보름은 시골에서는 세 번째로 큰 명절이다. 오후부터는 아이들은 구슬치기에 딱지치기, 재기차기, 연을 날렸는데 동네 중심이라 할 큰 마당에서 어른들은 윷놀이를 하였다. 그 즐거운 놀이엔 으레 학 표라 하는 양은 다라이와 세신 표 스테인레스 식기가 한가운데 앉아 반짝거렸다.

 

마당 모퉁이에서는 남정네들 놀이를 기웃하며 여인네들이 볏 집 도마 위에 길고 커다란 널빤지를 올려 널뛰기를 하며 또 즐거워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 보름달이 둥그렇게 뜨는 저녁에는 환한 달에 온통 아이들 세상이다. 위아래 동네 구분 없이 아이들은 모두 나와 쥐불놀이에 열중하였다. 복숭아를 담았던 깡통에 반질반질 달은 다이아 표 검정고무신을 쪼개어 넣고는 시커먼 불길이 활활 타오르도록 했다.

 

메케한 연기 속에 피어오른 불꽃은 고무신만큼 질겨서 여간해선 꺼지지 않았다. 그때쯤이면 고추 밭에 남겨진 줄기는 제법 뻣뻣하기도 하여 타다닥 타는 소릴 내며 마른 장작 역할을 톡톡히 하였고 개들도 덩달아 벌겋게 달아올라 컹컹 짖었다. 큰 집 사랑방에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모여 마작을 하거나 대나무로 길게 만든 투전놀이를 하였었다.

 

그날은 온 동네가 그렇게 그저 즐겁기만 하면 되는 날이었다. 설날과 추석이 가족을 위한 가르침이라 한다면 정월 대보름은 자신과 이웃 나아가서는 동네와 더불어 사는 미덕을 가르치는 뜻 깊은 명절이다. 자신의 운과 복을 기원하고 협동, 인화, 단결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무병하고 대보름달처럼 두리둥실 둥글게 살라 하는 조상들의 뜻이 담겨있다.

 

이 나이에도 빙글빙글 밝게 물들이는 불꽃놀이가 다시 하고 싶고 그 뿌듯한 환한 웃음 속의 그리움이 어린 동화처럼 되살아나는 것은 정월 대보름이 갖는 따사로운 마음의 향기 때문이리라. 그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 남아서인지 나는 정월 대보름이 찾아오면 윷놀이를 하곤 한다. 어느 사상 이론보다도 신성하고 숭고함을 지닌 포근한 정월대보름. 그러기에 나는 빙글빙글 밝게 물들이는 불꽃의 동화 속에서 은은한 대보름달을 낭랑히 쳐다보며 올 한해 무탈 무사 안녕을 빌고 있는 것이다.

 

 




  • ?
    김기복 2012.02.03 16:27

    우리 고향 남쪽에는 달집을 지어 보름달이 뜰 때 달집에 불을 놓았었다.

    동리마다 누가 크게 짓고 불을 크게 내는지를 경쟁하듯이 했었다.

    갑자기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 profile
    권화현6 2012.02.03 17:21

    참 글맛 좋다...

    30년쯤 후엔 정원 대보름을 뭐라 기록할까?

    도시의 정월 대 보름은 마트에가서 지천으로 널려진 부럼사고

    포장 잘된 오곡봉지와 나물봉지 사서 지난 시간 풍습 이야기하던,

    추억의 끝자락의 이야기를 나누는, 건조한 이야기를 할 생각하니...ㅈㅈㅈ이다.

     

  • profile
    조성원10 2012.02.03 23:10

    원래 이 글엔 배경으로 정태춘에  동방명주 곡이 제 격인데 삽입이 안되네.  지기님이 한 번 힘을 써보면 어떨까.  댓글 감사하고.   나는 고추밭에서 빙빙돌리던 때 ...

  • profile
    권화현6 2012.02.04 12:51

    정태춘의 노래를 붙여 보았는데...들리는지??

    사이트 관리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들을수 없도록 되어 있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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