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8 11:19

정선 가리왕산 연가

조회 수 1718 추천 수 0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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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창낭창해서 한없이 부드럽기만 할 것 같은 가느다란 대나무 장고채가 팽팽한 가죽 두들겨서 울려대는 소리는 그렇다 치자.

야멸차도록 끊고 맺음이 분명한 타격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날카로워 듣는 이들 신경섬유의 어느 한 부분을 흔적도 없이 잘라 놓을 기세다.

 

"처음에 정선 왔을 때는 엄청 답답했어요. 산이 항상 눈앞에 가득 다가왔거든요. 시간이 지나니 산이 뒤로 물러나더군요. 그 다음부터 견딜만해요."

 

동해시가 고향이라는 정선군청 산악회 고재근회장(32세)의 말이다.

항상 툭 터진 바다를 보고 성장한 그에게 산이 코 앞에 바로 다가서는 정선땅은 일종의 충격이었으리.


 

정선 온 지 6년, 산에 다닌 지도 6년이라는 그와 함께 벽파령부터 중왕산 가리왕산 거쳐 비봉산까지 종주 산행을 하리라 약조하고 자리를 파하니 한밤중이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린다. 억수장마로 내린다. 산이 떠내려가라고 내린다.

43대째 정선서 살아온 나병기씨(46세·정선군청)가 밤늦게 아리랑 명창과 함께 프린스 승용차를 몰고 넘어가는 솔치재에도 줄기차게 퍼붓는다.

 

가물가물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 누군가를 마냥 그리워하고, 올라야 할 가리왕산은 자꾸만 멀어져 간다. 좇아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가까이 다가오는 산, 그게 바로 가리왕산이다. 그게 바로 그리움이고, 그게 바로 세상 사람들 사랑하고 미워하며 헤어지는 이치이다.

 

그게 바로 정선 아라리 줄줄이 애달픈 사연이다.

잠 깨어 손목시계 들여다보니 야광시침은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다.

비는 그치고 별빛은 마냥 찬란하다. 물소리 가슴 시리고 목메이는 슬픔 가리왕산 하늘 별빛만큼 은색으로 빛난다.

 

구름 모여 흗어질 줄 모르는 가리왕산 아침은 마냥 신비롭기만 하다.

밤새 구름 속에서 자작나무, 주목, 층층나무, 전나무, 잣나무,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거제수, 참나무, 단풍나무, 오리나무, 뽕나무들 평화로운 잠 이루고 그 밑에 누운 곰취, 미역취, 개미취, 참나물, 둥굴레, 하늘나리, 곤드레, 더덕, 박새, 이질풀, 쐐기풀, 하늘나리는 단이슬 맞으며 저마다 행복한 꿈을 꾼다.

 

임도 때문에 꽤나 헷갈리는 등산로를 찾아 가리왕산 꼭대기에 오른 것은 점심도 훨씬 지난 시간. 사방 수백리까지 보이는 맑은 하늘에 구름 몇 점 오가며 벗하잔다.

정선땅 가리왕산에서 아주 살라 한다.

 

강릉 비행장에서 떴을까, 단검처럼 날렵하게 생긴 F-5 전투기가 푸른 하늘을 날며 마음껏 즐기고 있다. 자유롭다. 가리왕산 꼭대기 바위 위에서 몸 말리는 독사도 자유롭듯 서로 참견하지 않는 자유다.

 

멀리 진부가 보이고 그 너머 백두대간에 걸친 흰구름 줄기줄기 내륙쪽으로 밀려들고 있다. 동해 바다가 그득히 밀려들어와 있다.

산너머 산이 있고, 그 뒤에 또 산이 있으며 서쪽 그 멀리 아스라한 곳에 백덕산 치악산, 더 멀리 보이지 않는 곳, 서울쪽에서는 그리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땀에 젖은 옷 훌훌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맞는 그리움이다.

 

그냥 산에 눌러 앉아 살아도 될 만큼의 넉넉한 그리움과 취나물 곤드레 딱주기 양식 삼아 몇 삼년 이산 저산 헤매볼 일이다.

갈왕(葛王)처럼 숨어살며 갈왕산(葛王山) 멧돼지며, 산토끼, 노루, 삵쾡이, 오소리, 족제비, 다람쥐들과 벗해볼 일이다.

 

하늘나리. 벽파령에서 중왕봉, 상봉, 민둔산에 이르기까지 능선길에 핀 이꽃은 잊을만하면 한두송이씩 나타나 종주산행의 피로를 씻어준다. 민둔산 가는길, 탐스럽게 익은 산 딸기가 길손을 유혹하고 있다.

   

정작으로 가리왕산 꼭대기에 올라 하루 묵어갈 요량으로 텐트를 맵시나게 친 저녁, 평창쪽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구름은 도무지 걷힐 생각이 없다.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에 카메라 다리를 접어 넣고 일찌감치 잠을 청한다.

구름 위로 조금쯤 보였던 저녁놀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쉬임 없이 텐트 플라이를 흔드는 바람과 빗방울 소리에도 잠이 밀려든다.

 

셋이 나란히 누워 비좁기만한 텐트인데도 길게 허리펴고 누우니 살 것 같다.

무거운 등짐 지느라 수고한 허리가 마냥 편하고 젖은 등산화 벗어던진 발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잠이 올 듯 말 듯, 셋중 누구도 깊은 잠 못이루는데 바깥이 소란스럽기만 하다.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각인 것 같은데 한 패거리 올라와서 텐트를 치느라 법석이다.

"어머, 여기 텐트가 있네." 애띤 여학생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함께 누워 있던 김범수기자와 고재근회장은 벌써 밖으로 나가고 없다.

여고 등산반 학생들이 올라온 모양이다.

 

지도교사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어 다가가 환담을 나누는데 아무리 애써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산정에서 생긴 텐트촌을 흐뭇해하며 침낭을 다시 눕자 바로 깨고 마는 꿈이다.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 셋이 함께 있으면서도 지상 세계의 사람들이 그리웠나 보다.

그러니 그 한밤중에 비바람 무릅쓰고 이곳까지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믿었지.

 

잠시나마 행복했던 꿈 아쉬워하며 잠을 청하는데 이번에는 누군가 텐트 안으로 들어와 내 머리맡에 앉는다. 웬일일까?

오늘 밤에는 가리왕산 꼭대기를 찾는 길손들이 왜 이리도 많은 것일까?

이런 저런 얘기 나누다 보니 너무도 다정한 이야기인지라 현실이거니 믿고 싶어도 그 역시 꿈인 것을.

 

밤새 멧돼지가 텐트 주위를 맴도는가 보다.

음식 냄새에 끌려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텐트 끈을 건드리기도 하면서 비닐 봉지를 뒤지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난다.

 

천둥소리는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고 뿌리다 말다 하는 빗방울에 누구도 쉬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정선 아라리 구구절절이 화살처럼 가슴 한 복판으로 쏟아지는 밤이다.

구름 스쳐가는 사이로 언뜻언뜻 걸어온 산줄기 보일듯한 아침, 풀잎들 잔뜩 이슬 매단 채 고개 숙였고 김범수기자가 하늘 향해 한소리 외쳐본다.

 

"한 번 비(보여) 주소." 경상도 사내의 간절한 바람이다.

비록 투박한 억양일지라도 한 번쯤 아름다운 그대 나신 송두리째 들어낼 법도 하건만 늦잠 자는 미인처럼 방문 굳게 걸어 잠그고 통 소식이 없다.

안타까워한들 어쩌랴. 모두 그대 뜻인걸.

 

가리왕산 상봉에서 중봉 거쳐 하봉 가는 내리막은 둔중한 육산의 진면목을 속속들이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온통 평탄한 사방은 나무와 수풀이 빼곡이 들어차서 능선이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넓은데 풀섶 사이로 조붓한 길 하나 끊어질 듯 이어지니 말이다.

구름 걷히고 정오나 되서야 해가 나니 숲은 온통 초록빛 그늘, 사방의 산 모두 가리고서 비밀스러운 커튼처럼 드리운다.

   

가다가 보면 멧돼지 놀라서 후다닥 달아나고, 땅 파고 눈 검정색 똥은 아직 물기 촉촉하다. 동작 느린 새끼 멧돼지 한 마리는 기어코 사람 눈에 띄고 말지만 그래도 숲으로 뛰어드니 종적을 찾을 수 없다. 가리왕산은 그런 산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와서 뜯어가도 발길에 지천으로 채이는게 곰취며 참나물, 더덕이며 머루, 다래다.

먹을 게 그리도 많은 산인데 번듯한 절커녕 암자 하나 없는 게 또한 가리왕산이다.

골 깊고 수량 풍부한 청양골은 탄광으로 황폐해졌고, 산기슭에 몇 채 남은 빈 집 뜰과 묵은 밭에는 개망초가 온통 하얗게 피어났다. 사람들 떠난 빈산에 유령인 양 핀 꽃이다.

 

멀리, 마음 떠난 몸 어디 깊숙한 유배지엔 / 개망초 지천으로 피어 있더라고 했네 / 한 달포쯤 아니 한 사나흘쯤이라도 / 죽음 데불고 가는 먼 들길 그 어디쯤 / 몸과 마음 함께 돌아온 유배지엔 / 유령같은 허어연 개망초 떨기떨기 허옇게 / 흐드러지게 흐드러지게 흐트러지겠다 했네

 

-姜禧山시인의 <개망초> 부분-

 

4대째 정선에 살고 있는 정선아리랑 명창 김형조씨. 그의 아리랑 가락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애절하면서도 낙천적이다.

 

헤어질 즈음에야 비로소 눈부신 햇살 아래 제 모습 드러냄은 무슨 뒤틀어진 심사이랴만 저녁때 되어 구름 불러모으는 그대 자태 문곡리 지나는 길에 마냥 웅장하더라.

   

벽파령에서 민둔산까지, 어은 청양 다래 성황 그나마 흰구름으로 얼굴 가리고 나타났구나. 눈물 감추려 구름의 베일 한 자락 머리에 썼구나.

 

몰랐어라. 내 진작 몰랐어라.

하늘의 길과 땅의 길 모두 하나로 통하고 그대 그 가운데 있었음을.

 

오대천 계곡 따라 진부 가는 길 잠두, 백석, 가리왕산 그늘 백석봉, 갈미봉에 드리우고 그 산그림자 다시 옥갑산, 상원산에 차례로 다정하게 드리워지는 저녁.

 

백두대간 넘은 구름 진부 하늘에 낮게 드리울 때쯤 갈왕산은 이미 멀리 뒤에 남겨두고 온 산이다. 愁心과 山水, 無常, 未忘 가득 실은 정선아라리 가슴에 담았기에 단연코 결별할 수 있어 마냥 아름답고 그리운 산, 그대 가리왕산이다. 

  • profile
    권화현6 2012.05.08 12:23

    산을 한바퀴 돌아 온 기분이네

    풍광을 가슴에 담고 사는 이 

    늘 행복 하겠네

    정선의 아라리 소리 귀에 다을제 

    가리왕산 곰취의 향기도 품을듯...!!


    이왕이면 사진도 한장 덧 붙이게...ㅎㅎ

  • profile
    김우선 2012.05.09 08:13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장으로 망가지기 전에 가리왕산 한 번 다녀옴세.
    번개 산행으로 1박 2일.
  • profile
    권화현6 2012.05.09 14:54

    좋치....멋있네////

  • profile
    류태용4 2012.05.09 18:25

    우선이 글 읽다보면 산을 노래한듯한 느낌이 든다.곰취 나물 뜯어 쌈장발라 보리밥에 싸먹으면 맛있으려나?

  • profile
    김우선 2012.05.09 23:52
    쌈장 있으면 최고지.
    돌구이 삼겹살을 곰취에 싸먹는 맛이란...
  • profile
    이종엽 2012.05.10 01:54

    그곳에 가고싶다...가만가만  들려주는 우선이 얘기 귀 기울이면서  편안함 느끼고 싶다.

    소주한잔  곁들이면 더 좋고...

  • profile
    권화현6 2012.05.10 09:54
    소주도 좋다...
    소주가 소우주가 되면 더 좋고....
    소우주는 무념 무상의 세계로 인도 할터이니....
    세상사 접어두고 소우주로 가 보자구...!!
  • profile
    김우선 2012.05.10 10:19

    요맘때쯤 정선 가면 동강 트레킹도 빼놓을 수 없지.

    쉬리가 헤엄쳐 다니고 호사비오리 날아오는 강가

    흰 조팝나무꽃이 눈부시도록 환하게 피어난 길을 걷는 행복...

    연포분교쯤에서는 '선생 김봉두'라는 영화도 찍어간 적이 있고.

    고성리산성에서 내려다보는 된꼬까리여울이며, 황새여울도 좋고...

  • profile
    류태용4 2012.05.10 10:35
    1박2일 가리왕산 번개 산행 하자.지금이면 아주 좋은 시기 일거 같은데.난 토욜 출발해서 이욜 오는걸로 일정을 잡으면 동참 가능.
  • profile
    김우선 2012.05.10 11:03

    5월 13일 토요일은 체육대회, 5월 19일 토요일은 연지산악회 북한산국립공원 둘레길,
    하여 5월 26일로 넘어가보니 초파일 연휴...
    방법이 있다면 5월 19일 둘레길 마치고 야간 운전하여 가리왕산휴양림에서 하루 자고 아침 일찍 산행 하는 건데, 누가 운전하지?

    하여튼 5월 19, 20일 가리왕산 번개 성원되면 떠날 수 있다.

    휴양림은 예약 끝났고 그 앞에 수정헌이라는 민박집이 좋다.

    <산장의 여인> 권혜경과 동명이인이 주인장인데 음식 솜씨도 좋고

    왕년에 산악인이었다는 소문도...

  • profile
    이종엽 2012.05.11 01:01

    좋은 기회인데  19일은  한분계시는 작은 아버님 칠순 잔치에 집안 종손으로 참석

    해야  도리일 것 같아서 저는 다음 기회에 참석 하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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