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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 러시아 詩의 태양에 관하여

 

1950년대에서 대략 70년대 초반까지의 옛날 기록 사진을 보면 재미있는 점이 한 가지 있다. 머리 박박 깎은 남자 중고생은 그렇다 치고 ‘국민학교’ 여학생들 헤어 스타일 역시 ‘단발머리’라는 점이다. 나중에 이유를 알아보니 ‘이발소’에서 깎아서 그렇게 판에 박은 듯한 ‘머리’가 나왔다는 얘기다. 일설에는 그 머리를 일컬어 ‘바가지 머리’라고 했는데 촌에서 집집마다 할머니가 손녀 머리에 바가지 씌워놓고서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냈기 때문에 획일적인 모양이 나왔다고도 한다. 하긴 그 시절 변변한 미장원 하나 없었으니 그나마 ‘동네 이발사 실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중에 졸업 앨범을 들여다보면 남학생들은 한결같이 ‘기계충’ 오른 삭발 아니면 상고머리에, 여학생들은 긴 머리 아니면 하나 같이 만화에 나오는 삼국시대 병졸의 투구 모양인 걸 발견할 수 있다.

 

그 시절 이발소 가는 일은 공중목욕탕 가는 일만큼이나 큰 연례행사였다. 특히 애들의 경우 이발소 의자에 앉으면 푹 파묻혀 버리기 때문에 널빤지를 팔걸이에 걸쳐서 앉히곤 했다. 그래야 이발사가 가위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앉은키가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대략 이삼십분 가량 한 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있는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벌이나 마찬가지. 지겨워서 조금이라도 꼼지락거리면 귓전에 대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이발사의 호통에 웬만하면 기가 죽기 마련이었다. 실력 없는 이발사의 경우 서툰 바리캉질이나 가위질로 생머리카락을 뽑아대기 때문에 아이들은 더러 이발소에 가는 걸 죽어라 싫어하기도 했다.

 

그러던 시절의 이발소에는 으레 낯선, 또는 알쏭달쏭한 풍경화 몇 점과 더불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되는 푸쉬킨의 시가 기본으로 걸려 있었던 것 같다. 대략 1970년대 말, 서울 변두리 달동네 이발소에서도 푸쉬킨의 시를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도대체 김소월의 시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러시아 시인의 시였을까?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움이 되리라.

 

슬프고, 절망적이며, 우울하고, 서러운 현재를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며 서러워하지도 말라는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표현 속에는 놀라우리만치 강한 힘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슬픔과 절망과 우울과 설움은 순식간에 지나가며 기쁨의 날이 온다고 흡사 종교의 ‘메시아’처럼 말하고 있다.

 

허름한 빈민가 이발소에 있는 듯 없는 듯 보잘 것 없는 액자 속에서 푸쉬킨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도 않으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주고 있었다. 현재에 대한 체념과 더불어 승화된 감정으로 기쁘게 미래를 맞이하는 것, 그래서 현재의 슬픔과 절망조차 내일의 소중한 그리움이 된다고 설파하는 이 엄청난 힘을 가진 시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절대 빈곤의 바닥을 헤매던 대한민국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알게 모르게 얼마나 큰 정신적인 의지가 되었을까?

 

왜정시대에 한서 남궁억이 지은 노래 <삼천리 금수강산>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 현재 찬송가 337장에 수록되어 있는 이 노래가 삼천리 방방곡곡 핍박받던 조선 민중들에게 불리워짐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왜경은 이 노래가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커다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금지령’이라는 억압책을 사용한 것이다.

 

금지 당하는 수난을 겪은 한서의 <삼천리 금수강산>에도 불구하고 삼천리 금수강산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기어코 두 동강이 나는 역사적 비극까지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삼천리 금수강산>이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처럼 그 자리에 들어선 시 중 하나가 바로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였다. 위대한 정신과 예술은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며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푸쉬킨의 문학, 푸쉬킨의 정신은 이미 러시아에서 그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바 있었으며, 한국 땅에도 상륙, 전후 고도경제성장시대 진입 단계에 이르기까지 고단했던 도시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져주는 ‘기적’같은 일을 행했다.

 

아마도 40-50대 이상 한국 남성들이 알고 있는 시를 대라고 한다면 한국 시인들을 제치고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단연 수위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이발소에 걸려있는 하찮은 낙서 정도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 또는 그런 종류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제외한다면) 어쩌면 구한말 이래 왜정시대까지 영미문학보다는 오히려 러시아문학과 공산주의 사상이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더 유행했다는 사실도 관련이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푸쉬킨은 어떤 시인이었을까?

 

1817년 리체이귀족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외무성 8등 관리로 임명된 푸쉬킨은 당시 러시아 전제정치를 타도하려 한 무장봉기단체 데카브리스트의 한 그룹 ‘녹생등잔’에 참여했다. 푸쉬킨은 또한 그 해에 <자유>, 1819년에는 <농촌> 등 과격한 정치적 시를 써서 남러시아로 추방당한 전력을 갖고 있다. 그의 소설 ‘청동의 기사’(1833), ‘스페이드의 여왕’(1834) 등은 죽기 1년 전에 쓴 소설 ‘대위의 딸’(1836)과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문학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푸쉬킨은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러시아 詩의 태양"이라고 일컬어진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문인 중 한 사람이 바로 알렌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이며, 러시아의 문학, 러시아의 정신, 러시아의 문화적 자부심 바로 그 자체가 푸쉬킨이다. 독일인들에게 괴테가 있고, 영국인들에게 셰익스피어가 있으며, 중국인들에게 이백, 두보가 있다면 러시아인들은 단연 푸쉬킨을 꼽는다.

 

(한국은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과연 “한국 시의 태양”이라고 일컬을만한 시인은 누구일까? 남북한 통튼 한국인의 삶과 정신이 담겨있는 독자적인 문학을 가질 수 있게끔 새 장을 연 시인은 누구일까?)

 

푸쉬킨은 시, 드라마, 산문에 걸쳐 두루 뛰어난 작품을 쓰며 러시아 문학에 새 장을 연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푸쉬킨의 등장과 그 문학적 업적으로 인하여 러시아는 비로소 러시아의 삶과 정신이 담겨있는 독자적인 자신만의 문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푸쉬킨이 그 후의 러시아 문화 예술과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는 데도 그 위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설흔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푸쉬킨은 그 비극적인 최후로도 유명하다. 푸쉬킨에게는 나탈랴 푸쉬키나라는 어여쁜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바람끼 있는 아내는 푸쉬킨을 속이고 언니의 남편 단테스 남작과 염문을 뿌린다. 단테스와 나탈랴가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은 러시아 사교계에 쫙 퍼지게 되고 나중에는 푸쉬킨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푸쉬킨의 정적들이 푸쉬킨을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푸쉬킨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결국 1837년 1월 27일 상뜨 뻬쩨르부르크에서 두 사람의 운명적인 결투가 벌어졌다. 이 결투에서 푸쉬킨은 단테스가 첫 발로 쏜 총알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이틀 후 사망했다.)

 

삶과 사랑에 대한 그의 열정은 문학 작품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푸쉬킨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사랑이고 열정이고 문학이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결투로 목숨을 잃었지만 푸쉬킨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100년에 걸쳐서도 이루지 못한 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서구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21세기 대한민국 땅, 대부분의 이발소는 없어졌고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옛날식 이발소’에서도 이젠 푸쉬킨의 시를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구원’이 필요 없게 된 걸까? 아니면 그야말로 “마이 쏘갓다 아이가”로 대변되는 ‘친구’ 버전의 정서적 변형과 동시에 문학적 업그레이드 시대가 도래한 걸까?

 

천양희 시인은 근작시 <푸슈킨에게>를 통해서 그와 같은 우리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삶이 그대를 속였으므로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지 않는다

어느 사이

오늘을 믿어도 가버리고

내일은 믿지 않아도 온다

실의의 날에

자신을 믿지 못했으므로

마음은 어제에 머무는 것

오늘이 기쁘다 해도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지 않는다

한 번도 그대를 속인다고

생각한 적 없는 삶이 그대를 속인다

삶이 그대를 속였으므로

벌 받으러 그대에게 온 것이다

-‘열린시학’ 2007년 겨울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여전히 유효하며,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단지 이발소에서 사이버 공간으로 그 걸려있는 장소와 아끼는 사람들이 달라졌을 뿐. 2006년 1월, 중학교 3학년인 내 딸은 자신의 미니홈피 ‘삶에 관한 시’ 코너에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의 시를 다음과 같이 원문과 함께 올려놓았다.

 

<제목>

 

Есль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예슬리 쥐즈니 찌뱌 아브마녵)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Есль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예슬리 쥐즈니 찌뱌 아브마녵)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Не печался не сердись(녜 삐촬쌰 녜 세르딧)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рись(프 뎬 우뉘늬야 스미리시)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뎬 비셀리야 베리, 나스따녵)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ёт(세르째 프 부두쉠 쥐뵽)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Настаящее уныло(나스따야쉬 우늴러)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Всё мгновенно, всё проидёт(프쇼 므그나벤너 프쇼 쁘라이둍)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Что проидёт, то будет мило(쉬떠 쁘라이둍 또 부돁 밀러)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글/김우선

  • profile
    권화현6 2012.02.22 00:33
    푸시킨의 재미있는 이야기 잘 보았네....!!!
    따님이 아빠 보다 한걸음 앞에 갈것 같네...!!!
  • profile
    김우선 2012.02.22 03:56
    음~맞아. 재학중인데 벌써 드라마 보조작가로 뛰고 있어. 가을쯤 방송에 나갈 것 같은데...
  • profile
    권화현6 2012.02.22 09:30
    역쉬...!! 피가 흐르고있군...!!!ㅎㅎㅎ
  • profile
    이종엽 2012.02.22 14:49
    즐감했네^^감사하게..
  • profile
    류태용4 2012.02.22 15:51
    우선아! 잘읽었다.시골 이발소에도 걸려 있던 그 시를 이렇게 끝까지 읽어본건 처음인거 같다.ㅎㅎ
  • profile
    김우선 2012.02.22 18:39
    무심코 지나쳤지만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동네 이발소에 늘 걸려있었던 시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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