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 길을 걸으며

by 조성원10 posted Feb 02, 20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아주 가끔 나도 모르게 은연중 부르는 노래. 불시에 찾아오는 그 노랜 가사의 앞뒤 구분이 영 시원치 않으며 부르다가 다른 일을 의식하거나 행하면 이내 또 자취를 감춘다. 그 노랠 부르리라 생각하고 부른 적이 없다. 슬그머니 귀 끝을 간질이며 왔다가 바람처럼 흐르듯 가는 것이 추운 겨울 밤 간간이 들리는 메밀묵 찹쌀떡 외장치는 소리와도 닮았다.

가냘픈 것이지만 그 노랜 꽤 오랜 세월 깊숙이 내게 들어와 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난 이 노랠 언제쯤 누구에게 주워들었던 것일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이 노래 또한 느낌 속에 같이 들어있다.

 

가물 하지만 아주 어릴 적 식모로 우리 집에 살러 온 누나가 동시에 떠오른다. 천생 고아인 누난 양 무릎에 실 꾸러미를 끼고 털실을 동그랗게 감는다던지 콩을 볶을 때나 방을 쓸거나 하는 반복되는 일을 할 때 꼭 이 노랠 흥얼거렸었다.‘누가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누난 그 노랠 몇 번이고 부르다가 고갤 쳐들어 하늘을 보곤 하였다.

 

누나의 과거로의 연결이 가능한 실마리인 것만 같은 그 노래. 발자국이 주는 느낌으로 필경 누구를 떠올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자국은 현재와 과거를 잇는 흔적이다. 현재지만 과거를 말한다. 달나라에 남긴 인류의 발자국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일까. 공기와 물은 발자국을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침식과 퇴적으로 지우기도 한다.

 

공기와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대로의 형상일 게다. 설령 여전하지 않다하여도 달나라에 남긴 자국은 시간 속 사실의 과거로서 영원히 존재한다. 발자국은 유형으로도 무형으로도 존재한다. 난 발자국하면  하얀 눈을 먼저 연상한다. 하얀 눈 속에 발자국은 유난히 선명하다. 선명한 발자국을 쫓아 오르는 산길에선 앞서 간 그 누군가를 꼭 한 번쯤은 생각해보게 된다.

 

 눈에 갇힌 산골마을. 누군가 마을길이 끊기면 마음 길이 열린다고 하였다. 심안의 눈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고립이고 단절이다. 고립을 딛고 일어선 첫 발자국은 그래서 설렘과 남다른 두려움이 있다. 나는 눈 덮인 고립된 산골 사립문에 발자국이 나 있기를 바란다. 흔적 없는 발자국은 들여다 볼 수 없는 과거를 지닌 묘연한 현재이다.

 

도심 속에 무수히 흩어진 발자국. 도심의 현재는 늘 감추어지는 차림들이다.  흔적이 없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때론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숨기고 싶은 과거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과거의 흔적이 흠뻑 밴 것들을 마주하면 믿음이 가고 흐뭇하여진다.


의자이든 테이블이든 하다못해 귀빠진 접시나 꼬깃꼬깃한 돈에 이르기 까지 진때가 묻어 삶의 연결이 자연히 느껴지는 골동품 같은 사물들을 대하면 잘 지켜냈다는 안도인지 왠지 외롭지 아니하고 편안하기 까지 하다. 회한으로서든 애정이든 설령 이별의 아픔이라하여도 과거와 현재가 어떤 느낌으로 같이 존립한다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끼어 있는 사이에 존재 한다는 것은 적어도 단절은 아니다. 발자국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사이로서 존재하며   틈을 만든다. 시간으로 쌓인 벽을 허물고 성큼 다가서게 하는 것은 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립은 틈을 만들지 못한다. 수백 년이 지나도 연결할 틈과 고리가 없다면 역사는 단절이다. 고려 시대의 무신의 정치와 르네상스 이전 중세를  다들 그렇게들 말한다. 서성이는 바람은 들락거리는 사이 빈 틈을 비집고 과거의 것을 여실히 묻어나게 하였다.

 

집요하기 까지 하다. 오랜 것엔 꼭 그 발자취가 남아 있다. 시간의 이음을 달리 나타낼 그 무엇이 꼭 따로 존재한다.  어김없이 오늘도 나는 발자국을 남긴다. 그 누구든 그 모를 훗날을 위해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하얀 눈 길 뽀드득 소리를 낸 발자국이 선명하듯 가슴 속에 하얗게 새겨진 발자국은 예쁜 과거가 되지 않을까.


그 시절 누나가 꺼내보던 그 발자국.  나 역시도 아버지가 남긴 하얀 발자국을 가끔 꺼내어 보곤 한다. 마음 속에 깊이 간직된 당신의 발자국.  지금의 나는 그 발자국의 이음이다. . 훗날 아이들도 나처럼 그렇게 내 발자국을 가슴 속에서 꺼내 보지 않을까. 그러기에 겨울 산 어느 누군가 만들어준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나는 또 어떤 하얀 발자국이어야 할지 생각하고 또 해보는 것이다.

(2005 12 24 금병산 하얀 눈길에서)

 

>